늘 입고되는 벤츠 e클래스.
그중에서도 이번은 e300이다.
오너께선 스피커 튜닝과 3d 부메스터 전동트위터 설치를 요청하셨는데.
국민 조합인 포칼 es100k + 3w2be 구성으로 튜닝으로 음질을 향상하고.
한국산 하이클래스 제품을 추가해 실내 퍼포먼스를 완성해드렸다.
순정과 비교해도 완성도는 나무랄 데 없는 한국산 전동 트위터.
가성비 중국산도 준비하고 있다.
차이는, 불량률. 그리고 a/s의 신속함.
금액 부담이 없다면 당연히 한국산이 좋다.
한국산 전동트위터는, 블람 (blam) 사제 유닛이 들어가 있지만.
포칼로 바꾼다.
더 나은 소리를 위해서 인 거고.
그로 인한 차이는 명확하다.
ㅇㅇㅇ제목 : 향수이야기 -오늘의 향수. 헝거리 워터에서 시작. PAGE : 1/3
1370년 항거리의 왕비에 의해 항거리 워터가 개발된다. 향료를 휘발성
이 강한 알코올에 용해시킨 것인데, 오늘날의 향수와 같은 초기제품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특히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용하자 유럽의 귀족들과 상류층은
물론 일반대중까지 다투어 사용하면서 급격하게 퍼져나갔다.
19세기이후 유기화학의 발달로 알코올 산업이 발전하고 나무껍질에서
물질을 뽑아내는 방법이 알려져 합성향료를 저렴한 가격에 제조할 수
있게 됨에따라 값비싼 향료를 대신하여 합성향료 시대를 맞게된다.
꽃 한송이의 무게는 약2g 1kg의 천연향료를 만들기위해서는 2백만개의
꽃 즉 4천kg의 꽃들이 필요했으니, 합성향료의 개발이 향수의 대중화에
절대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독일을 원정하면서 독일의 퀼른 지방에서 만들어지던 오데
코론이 프랑스 명사들에 의해 대량으로 파리에 들어와 유행하기 시작하
였으며, 퀼른 마을이름을 따서 불리어지게된 이 오데코론은 1685년 이탈
리아에서 태어난 요한마리아 파리나가 이탈리아에서 향료상인을 하면서
독일의 라인강변 마을인 퀄른에 와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향료를 수입
1709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팔았다고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탈리아사람 풀 디 훼미니스가 밀라노에서 처음
팔기시작했다고도한다. 모든 사람들이 퍼퓸과 오데코론을 모두 향수라고
생각하는데 퍼퓸은 알코올에 대한 향의 함유량이 15-25%이며, 오데코론
은 2-7%이다. 용도는 같지만 오데코론은 향수에 비하여 묽으며 가격이
낮고, 용량이 많다. 그리고 퍼퓸은 화장품으로 분료하고 오데코론은
청정품(TOILETRIES)로 분류하고 있다.
천연향료가 주종을 이루던 시대에는 가격이 높고 제조하기도 힘들고
향의 종류도 단순하였지만 근래에 와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그리고 다양한 향의 종류들이 나오고있다. 대개 20-30종류
향료를 조합한 것부터 50-100여종을 조합한 향수도 있다.
제목 : 향수이야기 -태초에 향이 있었다. PAGE : 1/4
세계 각 나라의 개국신화와 민족들의 창조신화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위치는 대부분 산이며, 커다란 늘 푸른 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의례히
곧게 자라며 사철 푸르고 단단한 향 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들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이 향 나무를 경외시 하였다는 의미인데,
신은 하늘에 존재하고 계시며, 높은 산과 그 산위에 곧게 높이 자란 향
나무가 하늘에 계신 신과 더 가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향 나무가지를
사름으로써 신과 인간간의 다리를 놓아 인간의 기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어왔다.
향은 영어로 '퍼퓸(PERFUME)'인데, '퍼퓸'은 휴머즈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고 휴머즈라는 어원은 [연기를 낸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향의 의미는 향나무를 피운데서 유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도 태백산(백두산) 꼭대기 단목숲이
있는 곳이 첫 도읍지임을 밝히고 있다. 단목은 박달나무를 말하며, 자단,
백단을 만드는 향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향은 애초에는 종교의식에 사용하였다.
신의 강림을 위해 향을 피우는 한편 종교의식을 치르는 자가 신체를
청결히 하고 향 바르거나 쓰임으로서 평상시와 다른 차림을 하는 동시
에 위엄을 갖추는데 사용하였다.
이와같이 종교의식에서 비롯된 향료는 고대사회에 와서는 향의 냄새가
죽은 사람에게 발생하는 악취제거 효과 그리고 향교가 지닌 방부, 살균
효과로 인하여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
다. 그러나 천연향류, 특히 고급향료의 생산량이 작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대중화되지 못하고, 왕과 귀족등 특수한 신분에만 한정되어 사용하였다.
인도와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향을 사용해왔다. AD372년경
고구려의 한 승려가 중국에서 향료를 가져오면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향의 역사는 이미 신라시대때 귀부인들이 향낭을 몸에 지닐 정도로 향료
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종교의식의 단계를 벗어나 아름다운 냄새를 발산시키기 위해 또는 신체
의 건강과 성적 쾌락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사용계층도 상류층과 하류층
의 남녀노소까지 확산되었다.
사용한 향료는 천연향료로서 향료를 알코올에 용해시킨 향수와는 달리
향식물을 짜서 만든 천연 화정유 였거나, 향료의 분말과 분말을 응고시
켜 만든것. 향료를 기름에 배합한것. 구φ 향물질 그 자체였다. 그러
므로 이들을 병에 담거나 향로에 사르거나 주머니에 담아찼다.
신라,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조 시대때를 고찰해보면 향유병과 향로
가 많이 제조되었으며, 향낭노리개가 유행 하였다고한다.
그리고 향의 분말을 몸에 뿌린탓에 머리카락과 옷이 하얀 상태였는데
이러한 모습이 바로 상류층의 상징이기도했다.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64)
88년 스티브 잡스가 넥스트큐브컴퓨터를 발표하기 훨씬 이전에도 신 기술로 교육방식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가 여러번 있었다. 과거 몇몇 기술예언자들도 자신들이 마련한 획기적 전기가 혁신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잡스만큼 확신 했지만 그들의 예언은 빗나갔다. 잡스가 영웅시했던 토머스 에디슨도 "시각 적인"강의를 가능케할 "모션 픽처"라는 효율적인 매체로 인해 "학교 수업에 서 책은 곧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필름 뿐 아니라 라디오 및텔레비전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화려한 예측들이 나왔다. 그들은 교육분야를 대대적으로 혁신시키고 미래를 주도해나갈 것이라고 장담했고, 책을 이용하는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런 제품들은교육분야를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60년 컴퓨터가 교육에 이용되기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MIT 미시간 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은 한동안 컴퓨터가 모든것을 혁신시킬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61년 MIT가 처음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수학 강의를 시험적으로 시도한 이래로 많은 학교들이 60년대 에 접어들면서 컴퓨터를 이용, 강의를 수백개 개설했다. "타임"
지는 "B.M. O.Cs:BigMacines On Campus(캠퍼스의 대형 기계)"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 도 했다. 65년 캘리포니아 대학이 어빈에 분교를 설립하였을 때 주정부는캘리포니아 대학 분교가 컴퓨터를 이용한 교수법을 개척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다. "컴퓨터 U"라고 불려지기도 했던 UC-어빈은 학교건물을 짓기도전 에 컴퓨터를 구입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시간에 설립된 한 대학은 도서 관을 설계할 때 수천권의 책만을 소장할 수 있게했고, 나머지 공간에는 시청 각기재 및 컴퓨터가 들어설 수 있도록 했다. "우리가 책을 싫어해서 이런설 계를 한 것이 아니다. 책은 이제 더이상 정보전달매체로서 최선의 방법이될수 없기 때문이다." 잡스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컴퓨터시대 초기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며 애플이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을 검토해 보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이것이 결국 불행 을 낳게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컴퓨터의 역사와 25년전에 이미 캠퍼스에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잘못된 예측이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더 유의했더라면 넥스트의 정책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넥스트는 큐브 컴퓨터가 대학에서 강사를 보조해 주는 이상적인 기계가 될수 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는 바로 그런 것을 필요로 했다. 즉 학생 개개인이 필요로하는 강 의를 컴퓨터가 할 수 있어야 했다. 교수들은 엘리트의 독무대였던 교육계가 민주화될 것이 라고 말했고 이것은 잡지를 통해 독자들에 게 전달 되었다. 레드북은 영국의 찰스 황태자 와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개인 교사를 두었다고 지적했듯이 컴퓨터는 모든 학생들이 과거 특수계층이 누렸던 특권, 즉 개인의 필요에 따라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말했다.
매콜스는 한 수 더 떠서 컴퓨터가 캠퍼스에 등장하게 되면 "평범한 사람이천재만큼의 생산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시스템 기획 실장인 로버트 치르기는 대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활동 력이 없고, 상호 작용이 없는" 책을 사용한 세대보다 "상호 작용이 가능하고 사용이 용이하며 신속한 해결책을 주는" 컴퓨터 강 사에 향수를 느끼게될것이라고 예상했다.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가 단순히 교수의 조수 역할로만 끝나지 않고 나중에는 교수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 당시 행동 심리학자인 프레드 켈러 는 제법 심각하게 "선생님이여 안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
이런분위기는 아직 컴퓨터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 으켰고 중도주의적 태도를 취한 사람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컴퓨터지원 강의를 보완적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평가하여 초현 대주의적 요소와 고전적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 산업계는 약삭빠르게 새 컴퓨터에 고전적 이름을 붙였다. 일리노이 대학의 시스템은 Programmed Log-ic for Automatic Teaching Operations의 머리글자 따서 PLATO라고 그럴싸하게 불렀다. 그 후에도 스탠퍼드 대학 이 SOCRATES, MIT대학이 ATHENA라는 약어를 사용하여 시스템과 고전적 요소를 연관시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런 학습용 기계를 누가 비난하겠는가? 기계를 통한 교육과 소크라테스식 개인 교수법은 닮은 데가 없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학자만이 그런 태도를 취할 것이다. 맥스웰 골드버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의 인문대 교수로 69년 매우 기분 나쁜 어조로 "소크라테스가 자기 이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무덤에서 걸어 나와 독약을 한컵 더 마실 것"이라고 말했다.
작성일자 : 1995.04.19
<시리즈> 매킨토시 신화주역 스티브잡스의 야망 (65)
전통적인 대학 강의에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전통적인 이름을 가진 일리노 이 대학의 플라토(PLATO)라는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은 다 낡은 텔레비전 세트와 16개의 키가 있는 키보드로 이루어졌고 다른 방에서 손으로 슬라이드 를 집어서 컴퓨터 스캐너에 비춰야 화면에 그림이 나타나는 시스템으로 1960 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개선되어 1백50여개의 강좌 를 완전 전산화시킨 매우 큰 시스템이 되었다. 일일이 손으로 슬라이드를 잡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전 자동화가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은 1970년대 말에이르러서는 스와힐리어 과목에서부터 시작하여 로켓 강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강좌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작 플라토에 대한 강의에는 이용되지않았다. 플라토는 민간 부문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넥스트의 후반시 기와 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료로 대학에 구형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대여해온 미니애폴리스에 본사를 둔 컨트롤 데이터사는 1977년 이미 개발된 시스템 강좌에 대해 로열티를 지불하겠다는 조건으로 일리노이대학으로부터 플 라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수받았다. 컨트롤 데이터는 프로그램 개발에 거액을 투자하여 다양한 기능을 만들어서 대학뿐 아니라 국민학교와 직업 교육 기관 에까지 시스템을 판매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컨트롤 데이터 의 노력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컨트롤 데이터는 몇년이 지나 9억달러의 적자를 내고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윌리엄 노리스는 창립자라 는 위치와 권위를 내세워 사업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토로 계속 수익을 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컨트롤데이터 이사진 들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그럼 왜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여 계속 확장시킨 플라토가 빛을 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은 기능을 계속 개발했기 때문이다. 플라토 는 대학이 기꺼이 플라토 소프트웨어가 내장되어 있는 본사에 있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전화선을 통해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을 임대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개발되었다. 1960년대에 타당한 전제였다. 그러나 1970년 후반 애플과 같은 여러 회사들이 플라토 터미널의 월간 임대료 1천1백달러 이하에 퍼스널 컴퓨터를 제공하게 되자 중앙 집중 컴퓨터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아니 사실 영원히 사장된 것이다. 그러나 컨트롤 데이터가 이미 자리잡고 있는 조류의 변화를 깨닫는 데는 몇년이 더 걸렸다.
플라토의 종말을 고하는 이 시점에서 1980년대 말 넥스트가 고등교육 기관에 넥스트큐브 컴퓨터를 제공할 당시의 넥스트와 플라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넥스트는 제품을 개체로 판매했다. 넥스트 본사 와 연결된 임대 회선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용이 제품 가격에 포함되지 않았다. 넥스트 컴퓨터는 그 크기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내용 그리고 스크린의 모양으로 봐서 매킨토시와 더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넥스트 의 창립자와 대부분의 초기 직원들이 매킨토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넥 스트가 역사적 배경을 지적해야할 경우가 생기면 반드시 매킨토시를 언급할것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굳어져 있었다.(넥스트는 넥스트큐브가 기존의 제품과는 다른 혁신적인 제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얼핏 보기에 넥스트 제품과 매킨토시가 유사한 점이 많은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넥스트컴퓨터가 발표된 다음에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아무도 원하지 않는 플라토와 닮은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넥스트컴퓨터의 가격은 학생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연구소가 주관해 야 플라토를 임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학생 또한 학부모가 아니라 연구소 등에서 넥스트 컴퓨터를 구입해야할 정도로 가격이 높았다. 매킨토시의 뒤를이어 퍼스널 컴퓨터 시대에 넥스트를 판매하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마케팅기법이었다. 시대에 뒤진 넥스트컴퓨터를 사려고 한 사람들은 메모리 확장 성과 대형 하드 디스크를 갖춘 첨단 제품을 과연 1만7천달러를 주고 구입해 야할 필요가 있는가를 두고 망설였다. 게다가 서비스를 받으려면 연간 1천6 백달러를 더 지불해야 했다. 이런 가격은 매킨토시가 캠퍼스에 제시한 1천달 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제안이었다.
교육기관 정도라야 넥스트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학생들이기숙사 방안에서 컴퓨터를 사용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넥스트컴퓨터 는 플라토의 낙후된 기술로 되돌아가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1960년대에 플라토가 처음 등장했을때 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컨트롤 데이터사가 1970년대 후반에 플라토를 판매하려고 했을 때 학생들은 퍼스널 컴퓨터를 대신 살 수 있었다. 그로 부터 10년후 넥스트의 사업 전략은 분명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고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기숙사 방 안에서 그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는 불편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환영받을 리 없었다.
넥스트가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왜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면 넥스트 큐브컴퓨터와 플라토터미널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유사점 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창립자의 지시에 따라 제품을 개발했다. "남들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보면 나는 왠지 북쪽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라는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컨트롤 데이터사의 윌리엄 노리스였다. 잡스도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른사람에 대한 반감은 사업을 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때때로 타협점을 찾는 것도 좋은 결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않았다. 게다가 두사람은 모두 제품 기술이 뛰어나면 별도로 마케팅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제품이 잘 팔릴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작성일자 : 1995.04.21
깔끔하게 장착해서 완성!
많이 해봐서 그렇겠지만,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제는 미드 베이스 차례.
앞서 작업한 고음 트윗과, 이제 할 미드베이스가 한 세트 구성이다.
그렇게 해서 es100k를 완성한다.
프런트 2웨이 4스피커를 충족하는 구성이다.
벤츠 e클래스 e300 순정이 있던 곳에 적합한 크기이고.
프레임의 높이까지 맞다.
여기서 조금만 더 높았어도 장착이 불가능하다.
이번 튜닝으로,
스피커의 감도, 효율, 과도특성이 좋아져서.
음이 또렷하고 선명해지는 결과가 있다.
더 큰 변화를 기대한다면 파워 앰프의 선택이 최선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같이하시길 권한다.
그에 따른 소리,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잘 알기 때문이다.
벤츠 e클래스 e300 도어 트림의, 신슐레이트 방음 작업으로 리스닝 환경을 개선하고.
완성한다.
실내 앰비언트와의 호환 연계성이 완벽한 것은 당연하다.
이제 남은 건 센터 스피커.
포칼 유토피아 라인 3w2be 미드레인지 유닛이다.
센터 이미지를 확고히 하고.
중역의 밀도 에너지를 보강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센터 speaker 다.
범용 유닛이기에...
자작나무로 가이드를 제작하고 적용해 완성한다.
그리고 입고 상태로 그대로 탈착했던 파츠들을 재 조립해서 완성!
그리고 오너께서는 만족해하시며 차량을 인도해가셨다.